[역사 속 그날들/풀버전] 치마폭에 가려진 카리스마 숙종, 왕이 되다ㅣKBS 141206 방송 - Tutorial video by KBS역사저널 그날 48:07

[역사 속 그날들/풀버전] 치마폭에 가려진 카리스마 숙종, 왕이 되다ㅣKBS 141206 방송

KBS역사저널 그날

One Key Take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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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왕권을 강화하며 신권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한 매력적인 왕이었다.

Executive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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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업적을 조명합니다. 숙종은 여러 왕비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며, 단종 복권과 같은 역사적 결단을 통해 조선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또한, 숙종의 통치 아래에서 대동법과 같은 경제적 변화가 이루어져 조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강조됩니다.

Key Takeaways

  • 숙종의 결단력을 본받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신중하게 분석하고 과감하게 행동하자.
  • 숙종처럼 주변의 의견을 존중하되,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자.
  • 숙종이 대동법을 통해 경제 체제를 개선한 것처럼, 자신의 분야에서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자.
  • 숙종의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계획을 세우자.

Key Insights

  • 숙종은 단순히 여인들에 의해 휘둘린 왕이 아니라, 자신의 카리스마와 결단력으로 왕권을 강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 숙종이 단종의 묘호를 복원한 것은 그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역사적 재평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숙종의 정치적 결정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의 통치가 경제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 숙종은 신권과 왕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철학을 잘 드러낸다.
  • 숙종의 통치 시기는 조선 후기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전환점으로, 그의 리더십이 어떻게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했는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Summary Points

  •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업적과 왕비들에 대한 이야기.
  • 숙종은 단종 복권과 같은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했다.
  • 숙종은 14살에 즉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 숙종의 통치 기간 동안 대동법과 같은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 숙종은 신권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다.

Detailed Summary

  •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무덤과 그의 왕비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며, 숙종의 사랑 이야기와 그가 역사 속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유를 탐구한다.
  • 숙종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왕이지만, 그의 업적과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통해 숙종의 진면목을 조명한다.
  • 숙종의 정비는 인경왕후로,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숙종의 왕비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한다.
  • 숙종은 단종을 복권시키고, 강빈과 같은 인물의 복권을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진행한 점에서 결단력을 보여준다.
  • 숙종은 적장자 출신으로, 그의 왕권 강화와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며,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사례를 소개한다.
  • 숙종은 14세에 즉위한 후, 송시열과의 대립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정치적 결단력을 강조한다.
  • 숙종은 가뭄과 기근 속에서 백성들을 위해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하는 결정을 내리며, 정치적 명분과 백성의 생존을 연결짓는 능력을 보여준다.
  • 숙종의 통치 아래에서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대동법과 같은 제도를 통해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끌어낸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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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정비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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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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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한 정치적 결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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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대동법을 시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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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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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왕권 강화에 대한 신하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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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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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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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자연재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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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신하들을 통제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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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은 조선의 몇 번째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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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조선의 19대 왕이다. 그는 46년 동안 재위하며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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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정비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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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의 정비는 인경왕후이다. 인경왕후는 숙종의 첫 번째 왕비로, 20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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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주요 업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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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영조를 낳은 것이다. 영조는 조선의 21대 왕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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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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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단종의 묘호를 내려주며 단종을 복권시켰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단종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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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정치적 성향은 어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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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견제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책임을 묻고, 자신의 권한을 확립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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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즉위 당시 나이는 얼마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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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14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적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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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왕비 중 장희빈의 역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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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장희빈은 남인의 지원을 받아 왕비가 되었으나, 결국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에게 밀려나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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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 시대의 경제적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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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 시대에는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대동법과 같은 제도를 통해 세금 체계가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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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이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여준 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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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쌀을 수입하되, 국경을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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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정치적 대립은 누구와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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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은 송시열과 정치적 대립을 겪었다. 송시열은 당시 조선의 정치적 거물로, 숙종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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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숙종의 통치 아래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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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숙종 통치 시기에는 가뭄과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기근이 일어났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쌀을 수입하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Study Notes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무덤은 명랑에 위치하며, 그의 곁에는 인현왕후와 인원왕후가 묻혀 있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와 희빈 장씨도 그의 곁에 함께 묻혀 있다. 숙종은 생전에 네 명의 왕비와 함께 있었으며, 이들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함께 묻히는 특별한 경우로 역사에 남아 있다. 숙종의 왕비들과의 관계는 그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숙종은 역사 속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 왕으로, 그의 이미지가 여인들의 치마폭에 휘둘린 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숙종은 단순히 여인들에 의해 휘둘린 왕이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드라마와 소설에서 그려진 숙종의 모습은 대중에게 친숙하지만, 실제로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즉위 한 달 후에는 아버지 현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행장을 짓게 된다. 그러나 송시열과의 정치적 갈등에서 숙종은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며, 1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단력을 보여준다. 이는 숙종이 단순한 어린 왕이 아니라,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임을 보여준다.

숙종은 단종의 복권 작업을 통해 역사적 재평가를 받는다. 단종이 폐위된 이후, 숙종은 그를 '단종'이라는 묘호로 복권시키는 결단을 내린다. 이는 숙종이 단순히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은 숙종의 통치가 단순한 권력 유지가 아니라, 역사적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나타낸다.

숙종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환국을 경험하며 정치적 갈등을 겪는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과의 관계를 조정하고,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송시열과의 대립은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며, 이는 그가 단순한 왕이 아닌 정치적 전략가임을 보여준다.

숙종은 조선의 경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한다. 이는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화폐 유통을 촉진하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하며, 숙종의 통치 아래에서 경제적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정책은 숙종이 단순한 정치적 리더가 아니라, 경제적 비전을 가진 왕임을 보여준다.

숙종은 외교적으로도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 그는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결정을 내린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숙종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우선시켰다. 또한, 그는 국경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취하며, 외교적 협상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숙종은 신하들에 대한 태도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는 신하들이 잘못하면 왕도 잘못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신하들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숙종이 단순히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의 관계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정치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나타낸다.

숙종은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현대적 시각에서 그의 통치와 업적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한 여인들의 치마폭에 휘둘린 왕이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치적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재평가는 숙종이 조선 후기의 중요한 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Key Terms & Definitions

숙종
조선 제19대 왕으로, 1674년부터 1720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성을 추구한 인물이다.
인현왕후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숙종의 정비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인경왕후가 정비였다.
인경왕후
숙종의 첫 번째 왕비로, 숙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인원왕후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한 후에 간택되었다.
장희빈
숙종의 후궁으로, 숙종과의 관계로 인해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후에 쫓겨났다.
환국
조선시대 정치적 사건으로, 특정 세력이 정권을 잡고 다른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단종
조선 제6대 왕으로, 숙종이 그의 묘호를 복구한 사건이 숙종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언급된다.
탕평책
조선 영조가 시행한 정책으로,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렴청정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대신이 왕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는 정치적 형태를 의미한다.
대리청정
왕세자가 대신하여 정치를 수행하는 형태로, 왕세자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대리로 정치를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동법
조선시대의 세금 제도로, 토지 세금을 현물 대신 돈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상평통보
조선시대에 유통된 동전으로, 숙종 시기에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Transcript

Korean (auto-generated) 4294 words 18 min read

[음악].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무덤 명랑 이곳에 잠든 숙종 곁에는. 인현왕후와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가 묻혀있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와 희빈 장씨도 숙종을 멀리 떠나진 못했다. [음악] 그래 한때 전국을 뛰어들었던. 희빈 장씨와의 사랑 이현. [음악] 왕과 숙빈 최씨 저런 유망한 것이. 있나 [음악]. 숙종과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굴곡만은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작품으로 재탄생돼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음악]. 하지만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던 숙종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음악]. 역사저널 그날 오늘의 주인공은 조선의 19대의 왕 숙종입니다 아마 숙종처럼. 그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남아있는 왕은 드물지 않을까 싶어요 주연은 아니고 늘. 누구의 남자 드라마에 등장한 왕들은 사실 많긴 많은데. 장르들이 조금씩 달랐던 거 같아요 태조나 태종은 정말 정통사고 느낌이고 영종조는. 약간 스릴러 장르 직종은 멜로 노래로. 연산군은 뭐 같아요 대부분. 장희빈이었잖아요 지금은. 정말 안타깝게도 할아버지 연기를 많이 하시지만 예전에는 정말 그때 카리스만 넘쳤거든요 그 당시에 그 흑백 tv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각종 박근형 장희빈 장희빈 막 사역을 받을 때 막 그냥. 정말 난리를 치던 그 장면이 오히려 그게 더 선명해서 그런지 예비 라면은. 여우상 느낌이 들어가지고 정선경씨가 그래도 조금 좀 표덕스럽게 연기를. 잘한 거 같고 김혜수 씨는 조금 대왕 대비 느낌이 좀 나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 숙성하면은 소위 말해서 그 여인들의 뭐 치마포에 휩쓸린 휩싸였던 왕 이런 이미지인데 두 개. 나란히 있는 쌍능이 숙종과 숙종의 첫 번째 갭이 인연하고 무덤이고요 위에 저 오른쪽에 가까이. 보이는이 무덤은 숙종의 두 번째 갭이 인원왕후의 무덤입니다이 왕비들 이외에.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무덤이 또 하나 이렇게 숙종부동 곁에 있고 더구나 극적인. 것은 1969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장희빈 무덤이 발견이 됐는데 이거를 또이 근처에 옮겨. 왔어요 결과적으로는 숙종은 생전에 함께했던 세 명의 왕비와. 장희빈도 한때는 왕비가 됐거든요 이렇게 4명의 왕비가 돌아가신 후에도 옆에서 같이 이렇게. 주무시고 계신 이런 경우는 숙종이 유일합니다. 여자를 좀 하면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교수님 인연하고 왕비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인현왕후를 숙종의 정비로 알고 계시는데 숙종의 정비는 인경왕후라는 거예요. 스무살 때 천연두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시 들어온 두 번째 왕비가 우리가. 자라는 인현왕후구요 윤연한 것도 30대 중반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세 번째 마지막 들어온. 왕비가 인원왕후입니다. 이건 좀 사실 그 으람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숙종의 근데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면. 일단 뭐니 뭐니 해도 영조를 나은게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쪽이. 영선을 나타났다면 그 조선의 가능했겠나 지금 이제 말씀하신게. 전반적인 일반인들이 생각이에요 교과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영정조의. 탕평책을 설명하기 위해서 숙종 때 환국이라고 하는 즉 영정주의 어떤 장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숙종 때의. 단점을 끄집어내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거든요 근데 오늘 진짜이 시간을 통해 가지고 좀 숙종에 대한 평가는 좀 다시 한번.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 결코 숙종이를 이렇게 어떤 부정적인 면만 갖고 있는 그런 왕이 아니거든요. 업종이 상당하거든요 장희빈의 남자도 아니고 영조의 아버지만. 기대해 보겠습니다 자 오늘 숙종이라는 인물 좀 차근차근 살펴볼 텐데요 저희가 좀 키워드로 정리를 해. 볼까요. [웃음]. 조선에서 두 번째 우리 아마 1위는 아실 겁니다 조선에서 최장수했던 왕. 영조 52년 제의하셨고 숙종이 46년 숙종이 2등입니다. 숙종이 길다라고 한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거 같아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다음 키워드 또 살펴보겠습니다. 숙종은 단종을 무고했다 동정. 숙소 단종을 동정했다 또 이런 날 했기 때문에 어떤 뭔가 동병사령 같은 거 느끼지. 않습니까. 한번 정답 보겠습니다. 숙종을 재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운데 숙종대 각종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벌어지거든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업이 바로 단종을 복구시킨 작업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단종이 폐위된 이후에 성단기간 노산군이라고 해서. 백운도 아니고 그냥 일반 왕자 가운데 하나인 노산군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죠. 숙종이이 사실을 알고는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려주는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단종이라는. 칭호는 사실 숙종의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죠 242년 만입니다. 그러면 숙종은 단종을 작명했다는. 얘기했지만 우리가 이제 요근래 다뤘던 그 소형세자의 안에 있잖아요. 강빈도 이게 다시 복권을 시키거든요 신호를 시킵니다 기본적으로 강빙 같은 경우에는. 그 할아버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그룹이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민감한 부분인데이. 숙종이 정말 강빙만 생각하면 너무나 측은한 마음이 든다. 라면서 아주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그런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결단력도 있고 강단도 있고 자 그러면 다음 키워드를 좀 보겠습니다. 숙종은 조선의 6번째도 아니고 6번째. 적당자 출신입니다 청소년 아니에요. 20대 이하 왕은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요것도 동시에 정답 처리해 줘야 돼요. 조선의 왕 중에 의외로 적정자 출신을 많이 많지가 않아요 총 7명인데 그중에. 이제 처음 그 적정자가 사실은 문종 단종 그리고 이제 연산군 인조. 현종숙종 수조 이렇게 보시면 대부분 좀 왕으로서 뭔가 문종은 좀 제2기간이 짧아서 단종은 교육. 삼촌에게 희생당하고 뭐 연산군은 문제는 너무 많고 인정은 1년제 일은 못했고 적장자 중에 왕다운 왕 역할을. 하신 인물은 적정자지만 아버지의 취약성은. 국적이죠 심양쪽에 태어나셨어요 지금으로 치면 시방국적 소지자가 돼버렸는데 국제가 아니죠 영주권 영주권. 근데 숙종은 그야말로 정통 엄청나게 뭐 요즘으로 치면 전형적인. 음치나 정통성 이런 속에서 탁 태어났던 왕이라는 거죠 결국 정말 그 저기. 강변이라는 것도 속정 본인이 적장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네요 그 자신감이 이런. 것들이 가능하겠던 거예요 정말 사실은 긁어 부스럼 만들 소지가 충분했는데 자기가 지금 명분상. 약점도 없고 콤플렉스도 없는 거예요 그런 걸 통해서 아마 자신이었던 그 왕권 강화 이런 것들도 접근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 키워드 볼게요. 무엇을 받지 않았다 이건 조금 어렵다 힌트가 너무 없긴 하다. 하는 거 어 그건 금방 알지 좀 얘기하시니까 궁금한게 헷갈리는게 항상. 보면 수렴 점점 그리고. 석점 이것들이 헷갈려요 누가 뭘 한 건지 좀 알려주세요. 정치를 어린 왕을 대신해서 해줄 때 발을 치고 정치를 한다 해서. 수렴청정이고 대리청정원 왕세 왕이 왕세자를 이제 대신해서 정치를. 시킬 때 대리청정이라고 그러고 이제 대원군 같은 이런 사람이 또 왕을 대신해서. 정치를 할 때 이런 경우 우리가 딱 떨어지네요. 사실 누군가 좀 도움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왜 안 받았어요 어린. 임금이 지배를 하면은 대부분 수렴청정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14살의. 수용청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숙종이 그런 시험 청소를 하지 않아도. 뭔가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혹시 어머니가 나는 그냥 안 할게 뭐 이렇게 나온 건 아닌가 아 그 어머니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어머니인데. [음악]. [박수]. 우리 조선의 왕비들 중에서 보통 우리가 왕비가 되려면 일단 세자 때 세자빈이 되어야 되잖아 그죠. 그러다가이 세자가 이제 그 선왕이 돌아가시면 왕이 되면 왕비가 되고 그. 다음에 자기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되는 걸 지켜보면 왕대비가 되잖아요 상관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몇 명쯤 될 것 같아요 바로이. 현종의 왕비 명성황후에요 그만큼 세다는 거죠 후궁이. 현종의 후궁도 없다 그랬잖아요 그런이 센 어머니가 결국은 수렴청정을 포기했다라는 거. 자체는 그만큼 더 숙종이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강했다는 걸 보여주고요 실제로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서 정말 결정적인 능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당시 그. 정치 거물이 있거든요 조선국이 정치검을 이거 모르면 아니 이거. 가격이 없는 거예요. [음악] 정말 대단한 정치인 성실 아닙니까이 송시열이이. 숙종하고 한번 맞붙는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게 14살 때 14살이면 좀 중학교 2학년이거든요.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데 그 모습을 한번 받을 것 같아요.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 즉위 한 달 후 숙종은 아버지 현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행장을 짓게 한다 하지만. 완성된 행장을 본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음악]. 문제가 된 부분은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송시열에 관한 것. 숙종은 집요하게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한다. 14살 숙종과 68살 송시열의 기싸움. 숙종이 말한 송시열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음악] 저는 갑자기 제가 14살 때 뭐 하고. 있었나 이건 보통 배짱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예순. 68세면은 명예교수나 석자 교수예요. 기록을 보면 이때 숙종의 나이가 14살이었는데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온 집안이 떨지. 가장 무서운 아닙니다 그. 숙종의 증조부인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거의 정계상. 사상계의 중심에 있었던 그야말로 우리로 치면 정치적 학문적 거물이었거든요. 게다가 숙종의 그 할아버지인 효종 그리고 또 아버지는 현종의. 스승이기도 하고요 자짜가 붙는 공자 맹자처럼.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그런 인물이었거든요 게다가 그 실록에 보면요. 송시열을 쳐 보면요 약간 3000번 정도가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송시열이 실로. 검색하면 3천만 나오기 때문에 논문 쓰는 걸 대부분 포기를 너무 많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14살은 포기하지 않고 대단한 14살. 에 그것도 같이 이런 왕이 그 산전수전 자격은 노회현 정치인을. 상대로 해서 이렇게 어떤 강수를 두었다라고 생각을 해보면 [음악].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통성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아무리. 본인의 능력이 있어도 정통성이 힘들린다면 대표적인 임금이 영조 같은 경우죠 영조는. 능력으로 따지면 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임금인데 바로 그 본인의. 출신 한계 때문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까 반란도 일어나고 또 정조의 경우에도 사실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겪고요 적잖자 프리미엄 같은게 있어서 그게. 없는 사람들은 왜 오랜 기간 아버지 추존하고 뭐 어머니 심한 분기시고. 이런 거에 굉장히 시간을 낭비하는데 숙종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죠 [음악]. 힘이 있었지만 사실은 단종도 정통성 분명히 있었잖아요 연비도 비슷하고. 그렇게만 비교하기 좀 그런 거 같고 분명히 숙종은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었다라고. 저는 좀 보고 싶네요 [음악].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왕한테 지긋한 어르신이 면박을 당했단. 말이에요 1659년에. 효정이 승아했을 때 이제 그 자이대비라고 그래가지고 인조의 갭이 이분의 삼국을. 3년을 입을 것인가 1년을 입을 것인가 그때 이제 주로 난민들은 3년을 입은 것이 맞다 왜냐하면. 효종의 왕으로서 중통성을 인정을 하는 그런 입장이었다면 그때 서인 그중에서도 송시열 같은 사람이. 주장하기에는 이거는 이미 그 인조의 개입이 자이대비가 소현세자 때 이미. 상복을 3년 입었으므로 효종은 차남이다 차남에 해당하는 일련복을 입어야 된다. 이것이 송실이 주장이었거든요 근데이 기회의 여성 때는 워낙 서인들이 정계 뭐 이런 걸 다 이제. 주도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어요 근데 바로 1674년에 이번에는. 돌아가셨을 때 또 이번에 논쟁이 일어났을 때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그대로 논리를. 적용을 해요라는 입장을 강조하는 논리 상당히 위험성이. 있는 논리죠 이거를 이제 현종이 이때는 제대로 파악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게 송시열이 잘못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이제 지적을 하면서 상당히 서인들이. 실각하는 단서가 됩니다이 사건이 상복 때문에 바뀐 거죠 1년차. 왕이 50년 정권을 뒤집은 거잖아요 조선판 다윗과 골리앗을 보지 못한이. 논쟁은 그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었다라고 봐야 되는데 어쨌건. 송시열을 중심하니 서인 세력들 같은 경우에는 효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서 어떤 신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어떤 그런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고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자이대비라는 분이 등장을. 하는데 되게 조금 입장이 곤란했을 것 같아요 뭐 아들 때도 그렇고 며느리. 때도 그렇고 나 때문에 자꾸 문제가 있으니까 옛날 그 어르신들이 그런 얘기했거든요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거를. 본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법적으로는 효종의 어머니지만 실제로 나이는 효종보다 5살이 어려서 그리고. 표정이 세상을 떠났을 때 36살 밖에 안 됐었죠 그리고 나서 이제 며느리. 복귀하지 또 입게 되면서 본인은 원한 것은 아닌데 아마 그래도 입장은 굉장히 난감하지. 않았을까. 근데 현종이 사실 문제를 다 정리한 거네요 근데 왜 숙종이 다시이 문제를. 들고 나왔나요 문제가 된게 현종의 행장 조선시대에는 뭐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그분의. 일대기를 행장으로 쓰게 되는데 구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종의 행장을 쓰게 되는데. 당연히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이 송시열의 예송 부분인데 또 아주. 묘하게도이 행장을 여러분이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라는 분인데. 스승에 대해서 굉장히 그 안 좋은 얘기를 쓰지 않으려고 하니까 거의 뭐 몇 차례나. 강압적으로 밀어붙여서 결국은 송시열이 예를 잘못 적용했다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쓰도록 요구를 하죠 그래서 이단화가 나중에는 스승을 그렇게. 욕을 한게 자기도 이제 게임식 하니까 숙종의 요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이렇게 썼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숙종이 그때 정색을 하고 너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모르느냐라고. 준엄하게 저는. 약간 태종이 다시 살아나오는 그런 느낌이 있거든 근데 뭔가 그 할아버지 정통성을 부정한 거. 외에도 뭔가 좀 잘못 보인게 있어서 이렇게 끝까지 물건 늘어진게 아닌가 이런 심정이 좀 들거든요. 숙종이 주기 초에도 주변에서 워낙이 송시열이 건물이니까 송시열을 불러들이. 했을 때 또 송시열도 이렇게 좀 오히려 부담이 된다 해서 오히려 거절하고 사직하고 대부분 내려가. 버려요 숙성 입장에서 뭔가 이렇게 좀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터에 할아버지의 이런 왕통을 깎아내리는 이런 조차들. 이러면서 결국 홍시열과 그 숙종이 대립은 정말 왕권의 정말. 귀한한 왕 바로 그런 왕과 이제까지 수십 년 신권 대표주자로 활약했던. 송시열이 정말 그야말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그런 형국이라고도 볼 수 있죠 이런 것까지 결격됐다는게. 정말 참 치사해 보이는데 현종 실록에 보면 숙종의 탄생이 있을 때. 송시설이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요 그 정도예요. 탄생을 모두 들어와 축하드리고 있는데 시어리 홀로 축하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저럴 수가 있는 건데. 근데 또 주목되는 것은 현종 개수실록이 있거든요 원자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을 때. 신은 때마침 대죄할 일이 있어서 변명을 하는 거예요 송시열이 자신의. 입장을 여럿이나들처럼 작은 정성이나마 나타내지 못하였으니까 오히려 현정실로. 보면 조금 무조건 송시열이 잘못한 것처럼 보이는데 저 현종 개수 실력을 보면은. 상당히 이유가 있어서 그렇구나 상당히 내용의 차이가 보이는 요런 것이. 주목이 되죠 그것이 바로 우리 조선. 후기 치열하게 전개된 당쟁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 대표적인 대목인데. 현종실록은 바로 숙종 초반에 그 남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남인들이. 입장에서 쓴 실록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송시열 같은 사람을 상당히 비판을 하죠 그리고 현 웃으실력은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쓰니까 아주 서인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쓰는다는. 것은 그 집권세력이 약점이 있다는 거죠 어떻게든 다시 고쳐서라도 자신이. 어떤 그 재평가를 받아야겠다는 의지 이런 것들이 반영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그나마 상대편에 기록을. 없애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이 비교해 볼 수 있다 이건 또 다행이라고 이전에 어떤 기록을. 폐기한다거나 조작하는 수준까지 갔더라면 저는 조선은이 조선왕조 500년이라고 하는 시간은. 버티지 힘들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조선은 품격 있는 나라고 염치가 있는 나라였다라는 지금 위험한. 발언하신 거예요 그럼 이전에 기록을 완전히 폐기하고 조작하는 수준의까지 떨어진 나라를 이제 금방 망하겠네요. 염치가 없죠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막. 역사를 새로 쓸 정도라면이 대립이 만만치 않았던 얘긴데 송시열 문제는 어떻게 됐어요이 기회를. 남인들이 놓칠 리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송시열을 파괴시키라고 욕을 하는데. 숙종은 요즘 말로 하면 그냥 아주 쿨하게 인정을 해버리고 취직시켜라 결국. 마지막에 함경도 덕원으로 송시열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어쨌건간에. 결과론적으로이 나미는 한 50년 만에 완벽하게 정권을 잡은 거죠 물론 이제 그게. 스스로 쟁취한게 아니라 왕의 힘에 의해서 주어진 그런 권력인 한계는 있겠지만 말이죠 남일은 사실. 지금 구교가 엉덩이 권력을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전국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금 돈은 14살 왕이이 정도로 강단이.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 생겼습니까. [음악] 10월 26일. 숙종의 정비 인경왕과 숨을 거둔다 [음악]. [음악] 다음의 5월. 새로운 왕비가 간택된다 서인의 핵심 인물 병조판서 민주주의. 딸이다 [음악] 철저히. 서인의 주도 아래 이뤄진 국헌 정치적 계산으로 성립된 국호는 불안한. 정국을 예고한다. 자 좀 우리에게 익숙한 인연왕후가 등장했습니다 모친도. 서인이고 서인 쪽에 미인이 많아서 그러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그렇게 서인이 계속 왕비가. 된 거죠 그래서 이거는 이제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이 제일 그 뭐 요즘으로 치면.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것 중에 하나가 무신쿠콘 국헌을 잃지 말자 그러니까 왕비는 무조건 우리 서인. 집안에서 드려야 된다 이제 그런 전통이 계속 이어져 가지고 숙종은 물론이고 이후 뭐 경종이니. 영존이 하 왕비들은 다 서인 집안에. 교수들 차지했는데 딱 한 명 예외가 바로 장희빈입니다 장희빈이 남인의 지원 속에서이 왕비가. 된 바로 그런 여인이었는데 결국은 장희빈은 이제 결국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거예요 슬로건을 잘 이렇게 이행을 한 거네요. 그러니까 정치를 말을 하려면 콘테크에 집중하자 근데 나민이 지금 사실 정권을. 잡았으면 남인 입장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 거기는 왕비가 안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제 장희빈 외에는요. 그러니까 운이 없었던게 남인들이 딱 짚고 난게 1674년부터 1680년까지 대략 요때가 남인. 정권인데 이때는 혼사가 없었어요. 계속 버티면서 갔어야 되는데이 6년 만에 다시 정권을 내주거든요. 그러니까 아까도 이제 말씀하셨지만 확 확 바뀌잖아요 그래서 환국이거든요 이게 이렇게 되면서 남인이 만약에. 계속 집권을 했더라면 아마 왕비도 남인 집안에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기회를 놓친 거죠. 황국이란 말이 등장할 때마다 저는 사활한 말이 헷갈리더라고요 사실 사화는 우리가. 보통 16세기에 살인파들이 어떤 정치적 대립에서 화를 입었다. 그래서 살인파들이 화를 당했다 해서 사와 한국은 상당히 중립적 표현이에요. 국면 정치적 국면이 바뀌었다 그래서 보면 우리가이. 경신 한국 같은 경우는 경신년에 대출처 경신년에 그게 쫓아냈다 이런 식으로. 잡화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도 쓰기도 합니다 교과서적 입장으로는 사림대 훈구에 권력투쟁 사립대 사림의 권력주체 그. 차이로 배우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남인이 어렵게 얼떨결에 정권을. 잡았는데 고작 6년이요 6년 만에 또 정권이 바뀌잖아요. 남인들 뭐 큰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나요 표면적으로 결정적인 실수는. 1680년에 일어나는데요 이때 남인의 실세인 영의정 허적이라는 사람이. 축하 자체를 열게 되는데 옛날 묘하게 비가 왔습니다 근데 또 숙종이 허적이 일을 하고. 있으니까 천막을 가져다 주라라고 명을 내리는데 그러니까 이미 호적이 갖고 간 거죠. 그래서 주변에서 이미 호적이 갖고 갔습니다 야 하니까 숙종이 대노. 크게 화를 내면서 이거는 한 명에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한 명에게 하셨는데 한. 명에도 그 압구정에서 잔치를 벌리려고 했는데 그때 성종한테 좀. 왕실 쓰는 천막 좀 빌려주십시오라고 있는데 그랬다가 역풍을 가잖아요이 여섯 임금 모신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었던이 한 명에도 빌리지 못한 걸 허적이 마음대로 가져간 거예요 남인 허적이 조금 방심한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뭐 초등학생들끼리도 지우개 좀 쓸게 하고. 써야지 싸움이 안 나거든요 근데 왕의 물건을 허락도 안 하고 마음대로 쓴다 이거는. 조금 문제가 있는 행동 아닐까요 근데 사실 요즘 그 웬만한 회사에서도 전결 규정이라는게 있잖아요. 근데 뭐 왕이 극과 장막 하나까지 챙기고 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이제 남인들이 그런 거에 뭔가 이렇게 동태가 파악이 되고 있었다는 거죠이 숙종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정말 오래간만에 라민들이 이제 정권을 잡아서 뭔가 이렇게 신선하게 정치를 해줄 걸로 생각을 했는데 이거 보니까. 전혀 뭐 이렇게 뭐 자기들끼리 싸우고 뭐 이때 특히 그 난민들이 권력. 잡고는 또 자기들끼리 막 또 그 서로 당파가 갈려요 청남인이 탁남이니 이때 또이 잔치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게 그냥 단순한 자체가 잔치가 아니라 남인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자기들끼리 결집하는 요즘으로. 치면 당세 과시하는 그렇죠 그런 거를 이제 인식을 하고는 이것들을 한번 본뜨를 보여 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사건이 터지고 나서 허적이 하는 이야기가. 숙종 임 이게 사실은 그 전에부터 나를 좋지 않게 왔다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실은. 장막 사건과 상관없이 숙정임이 나를 좋지 않게 봤다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빌미를. 제공했다는 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남인이 이미 자신들의 세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 내지는 자만감 같은게 있었던게 아닌가 당시만 거 같아요 그리고 결국. 이제이 사건을 계기로 훈련대장이 교체가 되고 좌의정 대관이라든지 승지 다. 교차하면서 완전히 물갈이가 싹 돼버리죠 서인으로 그런 걸 보면 지금. 숙종의 어떤 그 패턴이 좀 일관성이 있어요 아까 그 행정사건이 있었잖아요. 송시열의 제자로 하여금 송실이 잘못됐다라는 걸 쓰게 해가지고 딱 잡은 다음에 집요하게 서인. 공격하고 이번에 또 천막 사건을 계기로 해가지고 또 남이 딱 잡은 다음에 집요하게 공격하고. 굉장히 정치적인 어떤 그런 임금이 아닌가 그 세력이 강화되고 이제 키워지는. 보이면 삭 뒤집는 거죠 사실. 서인들도 계속 그 정말 오랫동안 50년 동안 정권 잡았다가 뺏기면 너무. 찾고 싶잖아요 우리도 보면 이게 계속 권력을 맛을 보던 사람들이 일단 조직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보여요. 대표적으로 김석주라는 인물이 등장을 하는데이 김석주는. 현정비 명성황후의 사촌 동생이었어요 제가. [박수] 파악하기로는 공략 정치에 달인이. 사람이 이때부터 이미 정보망을 이제 가동을 합니다 그래서 남인 그 권력 핵심들한테 계속 그. 매수를 해가지고 소위 공자원들을 파견을 해가지고 동태를 살펴 거기에 딱 포착된게. 뭐냐면 이 허적의 또 서자 흑연이라는 인물이 그.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과 결탁해 가지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라는 이런 그. 진술들을 다 나오게 만들어요 김석주란. 인물이 첩자를 심잖아요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몰래카메라 기법을 쓴 건데. 시나리오도 본인이 쓰고 그리고 나서 연기지도까지 합니다. 아주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은 듭니다 근데 저 조상환은 그때 그린 소송한. 거죠 상상화가 아니에요. 쫑은 기본적으로 뭐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이 본인의 지상 과제였기 때문에 사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뭐. 남이 나고 손을 잡던 서인으로 손을 잡던 또 자신의 외척과 손을 잡던 사실 이거는 문제가. 아닙니다 특종 사실 어느 세력과도 손을 잡고 상대방을 견제를 하는데 사실 근데. 남인이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히게 된 이유는 바로 또 우리는 폭발을 하자 그럼 특별하려면. 새로운 군사기구가 필요하지 않겠냐 해서도 채찰서브라는 것을 만들자고 주장을 합니다. 근데 이게 굉장히 괘씸하게 보인 거죠이 녀석들이 병권까지 도전하는구나 이거는. 숙종에게도 못마땅한 거고 스스로 발목을 어떻게 보면 잡히게 된 거죠. 환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병권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조선시대 군사 쪽 하면. 또 이분이죠 우리 박금수 박사님 만물각을 통해서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그 나민이 설치하려고 했던. 총사령관 역할을 했던도 채찰사의 직속 예하부대라고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당시에이 도체 찰싹 영의정이 관례대로 겸하게 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영의정에이 군권을 대폭적으로. 강화시켜주는 그런 일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 백성들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지금 재정적으로 상당히. 어려웠을 텐데 당시 상황에서 지금 군용을 늘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죠. 특히 당시에이 국가재정의 특히 부담을 준 것은 군사 전원이 한양도성에 상주하는 그런. 훈련도감이 가장 문제 됐었는데요 많은 비용이 들게 되는 거죠 그래서이 남인측의 주장으로이 돈이 많이 드는. 훈련도감의 군사를 줄이고 교대로 근무하는 훈련 별들을 새로 만들자라는 주장으로 인해서. 훈련 벨트가 서로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이 명분이 되었던 훈련도감 감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훈련 될 때만 새로이 만들어지는 명분상으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균형을 줄이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덩치가 더 커진 셈이죠 도체 찰스 분을 남인들의 주장대로. 설치가 되는 건가요네 그렇습니다 남인의 천하였기 때문에 도체 철사부 복서는 관철이 되고요. 난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이 도체 철사 부위에 인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이 개성에 그 대응산성을 축조하고요이. 대응산성의 군사훈련을 매우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이 훈련 강도도 굉장히 높았는데요. 매일 무예훈련을 하고 열흘에 한번씩 진법훈련을 하는 매우 고강도의 훈련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나중에 확연의 옥사 때이 남인 세력이이 대응산성의 병력을 이용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그런 구실이 되기도 하죠 결국 이러한 도체 철사부는 남인의 실각과 함께 곧바로 협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남인도 서인두 물질적인 범권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숙종 같은 경우에는이. 병권을 당시 외척이면서 병접판서를 역임하고 있었던 김석주에게 모두 막힙니다이 김석준 그 이전부터. 숙종이 꽂아놓은 인물이 되겠죠 한 숙정이 꽤 했던 것은 자신의 외적인 김석주를. 통해서 중앙 균형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체제를 확립하게 됩니다. 권력 이동에 따라서 또 민감하게 또 이동했던 병권 문제에 대해서 오늘 잘 들어봤습니다 박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네 감사합니다 1695년. 최악의 가뭄이 조선을 덮친다. 내안인 [음악] 추운 기후가 지속됐던 소비나기. [음악] 느닷없는 이상 기후로. 농작물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조선에는 대기근이 발생한다. [음악] 가뭄. 호박과 같은 자연재해가 있다르자 흉년은 몇 년이나 이어졌다 오랜.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는 백성들 [음악].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밀심은 더욱 흉흉해진다. [음악]. 네 안 그래도 백성들이 힘든데 하늘까지 이렇게 외면하고 있어요 자연주에 오면은 지금도 사실은 기술이. 아무리 발달돼서도 힘들다고 하는데 이게 기술이 아주 발달된이 시점에서 몇 년 동안 저런 기근이 오면. 백성들은 정말 살기 어려웠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숙종은 이때 어떤 자세를 취하나요. 청으로부터 쌀을 좀 수입해 오자 수사를 수입하다가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면 백성들이. 좀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선에서는이. 철천지 원수 청나라 놈들의 쌀을 먹을 순 없다 특히 이제 서인을 중심으로 많은. 신하들이 쌓을 수입의 반대를 하는데 그래도 결국은 숙종 이걸 관철시킵니다 이것이 나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니까 성에 대한 명분과. 백성들의 굶주림을 연결시키지 마라 굉장히 강화 단호하게 숙종의 의지로 결국 이제 쌀이 수입이. 되죠 그때 반대했던 그 오늘은 그 쌀을 받았나요. 쌀도 그래서 일반 쌀이 아니라 홈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랑캐 살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사실 반대했던 신하들이. 이걸 뭐 먹을리는 없죠 이분들은 이런 쌀을 받아먹을 위치에 있는 분들은 아니니까. 원래이 쌀은 특히 기근이 심했던이 북쪽에 평안도 지방 주민들을 위해서 사실은. 수입을 해온 건데 막상 쌀이 들어오니까 대신들이 이것을 서울에 먼저 풀자라고 주장을 합니다. 막상 이제 쌀이 들어오니까 서울 지역의 미심이라고 하는게 사실 정치적 기반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근거지니까 서울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투자하는 거죠 요즘 말로 하면. 표되는 사람들만 먹여줘 뭐 이런 거잖아요 지금 예선 한참 심의 중일 때 왜. 지역구에 예선 대표로내는 경우인 것 같아요. 외교적인 측면도 역시 또 굉장히 강력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세종 때 사군 육진 개척해 가지고. 압록강 조만간 영토 확장을 하는데 시간이잖아요 거기가 굉장히 춥고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떠나는 거죠 그 떠난 지역이 누가 들어오냐면 오랑캐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오랑캐들이 들어오고. 또 청나라도 그때 이제 백두산이 또 관심이 또 있었고 이때 이제 숙종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준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단호한 협상을. 형한테 하라 백두산 전개비를 통해 가지고 어떤 청구의 그 국경선 문제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 굉장히 단호한 어떤 그런 모습도 지금 보이고 있습니다 숙종의 어떻게 보면 이런 멋진 모습이 많이 가려져 있었던 것 같아요. 청나라한테 쌀을 빌릴 때는 빌린다 하지만 국경은 넘어오지 못하게 또 막는다.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네요 정말 좀 이것도 좀 뜻밖이에요 백두산이 우리 영토를 확정된 곳이. 숙종되었다 이런 것들 좀 다시 한번 기억을 해야 할 것 같네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던 그 유명한 인물 있잖아요 [음악]. 다시 세운 왕이다 이렇게 평가를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효종과 현종. 병사원을 한 이후에 이렇게 안팎으로 무엇인가를 신경 쓰기에는 뭔가 여력이 없었던 그런 시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러니까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에 숙종 시대는 어떻게 보면 이제. 경제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시기거든요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막 발전하게 시작하는 시기인데 그야말로 농업사에서 성공업사회로 나갈 수 있게끔 그런 시스템을 만든. 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대표적인게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이제 그 이전부터 물론 추진해 왔던 거지만. 최종적으로 전국적인 대동법 시스템을 완성한 분이 바로 이제. 숙종이죠 그래서 그동안은이 공란 문제가 백성들의 정말 가장 힘든 고역 가운데 하나였는데이. 시스템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공인이라는 집단을 통해서 돈을 주고 이제 물건을. 왕실을 봤다 바치게 하면서 화폐 유통경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배경이 만들어졌고 이제 거기에 상평통보까지 유통을. 시키니까 화폐가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그런 진전이 됐고요. 숙종된 확실하게 나타나는 지표는 당장이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거죠 그래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숙종이 상당히 그 성과들을. 많이 내요 몇 차례 환국을 통해 가지고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백성들 입장에서 실감할 수 있는 정책적 변별성 같은 것이 있었느냐 나름대로는. 하려고 하죠 그 당시에도 어쨌든 사대부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에 기반을 하고. 때문에 그래서 이제 사실 숙종 무렵에 혹패법 호법 뭐 주전론 뭐 화폐. 유통론 각 정파마다 나름대로 그 대안들은 많이 나와요 그러나 숙종이라는 왕이 보기에는. 이것이 전부 미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어떤 당파적인 입장이 우선시대는 그런 정책이다라고 왕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으로 봤기 때문에 결혼 당파에 맡겨 두느니 차라리 내가 나서겠다 너무 당리. 당리하게만 명을 내 가지고 자기들끼리 또 이합 집사라는 이런 그것을 끊고 나는 왕권을 강하겠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것이 숙종 후반 탕평정치로 이어졌고 사실. 그것을 완성한 왕이 영조가 되는 것이죠 숙종의. 신하들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하나 그 일화가 있는데 숙종이 주스도라는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근데 보통은 배를 임금에 비유하고 물을 백성들에 비해서 백성들이 이제. 민심이 이단되면은 배가 뒤집혀서 임금도 뒤집어 볼 수 있다라는 건데 숙종은. 그게 아니라 물을 시나들로 표현을 합니다 신하들이 잘못하면. 임금이 잘못될 수 있다라고 어떻게 보면은 내가 문제가 되는 것은 너희들의 책임이다 너희들이 밑에서 잘. 받쳐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라는 표현인데 그만큼 이제. 숙종은 신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왕권 밑에 복습시키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임금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씀에서 약간. 숙종 스타일이 엿보이는게 신화를 물러 봤잖아요. 무슨 얘기냐면 백성이 무리라면 백성을 갈아치울 수는 없는데 신화라는 집단은 물갈이가 된다는 거죠. 제가 여자들한테 휘둘렸던 왕의 이미지가. 오늘 깨끗하게 말끔히 등극을 해서 우리는 말이죠 주로. 이분을 눕거나 앉았을 때만 받잖아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이시는 분이에요 저는이 숙종을 보면서 정말 다른 면모를 봤는데요 보면서 누가. 떠올랐냐면 유럽에서 그 절대 왕정을 풍미했던 루이 14세. 지문 곧 태양이다 이런 걸 통해 가지고 숙종은 태양이다. 태양왕 숙종 한번 이런 이미지는 어떨까 숙종은 휘둘린 왕이 아닌. 휘둘은 왕이었다. 학생들이 조선 후기를 굉장히 어려워합니다. 아주 어린 임금이 즉위해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신권과 그렇게. 갈등을 벌이면서 왕권을 주도한 이미지 그 다음에 또 수많은 여인들과의 그런 관계라고 하는. 아주 흥미진진한 요소도 있고이 인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숙종은 정말 매혹적인 매력적인 왕이다 숙종이란 드라마 나와도 될 것 같아요. 장희빈이 이렇게 주변인분들 빼고 업종이 중심이 된 드라마 나와도 굉장히 멋진 그런 드라마가 나올 것. 같아요. 하면서 좀 지금 굉장히 아쉬워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다음이 시간에는요 장희빈에 대해서. 장희빈에 대해서 저희가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요즘 뭐 우리 오빠가 돌아왔다 뭐 이런 이야기도 하잖아요 왕이 돌아왔다 숙종 그러니까. 왕의 귀환은 왕의 알린 왕이다 우리가 조선의 왕하면 내복은 이런. [음악] 정도의 왕을 기억하다가 중간에 가다 보면 뭐 다 뭐 전란을 기억을 하고. 또 뭐 당쟁의 역사를 기억을 하고 왕의 존재감이 없다가 바로 숙종된. [음악] 다음에 바로 뒤를 이어 영조 창조가 나오면서 아 조선이란 나라 왕의 나라. 맞구나 이런 생각을 붙여주게 하는 왕이다 드라마 제목도 나왔네요. [음악] [웃음] [음악].

Title Analysis

Clickbait Score 3/10

제목은 '카리스마 숙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숙종의 매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과장된 요소가 적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감정적인 언어 사용이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요소는 없으며, 제목은 비교적 직설적이다.

Title Accuracy 8/10

제목은 숙종의 역사적 배경과 그의 카리스마를 강조하고 있으며, 실제 내용에서도 숙종의 업적과 개인적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왕이 되다'라는 표현은 숙종의 즉위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여 약간의 불일치가 있다.

Content Efficiency

Information Density 60%

이 영상은 숙종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으나, 반복적인 내용과 불필요한 설명이 존재한다. 특히 숙종의 왕비들에 대한 설명이 여러 번 반복되며, 같은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숙종의 업적과 정치적 배경에 대한 정보는 유용하며, 전체적으로 약 60%의 정보 밀도를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Time Efficiency 6/10

영상의 시간 효율성은 중간 정도로 평가된다. 필요한 정보는 포함되어 있으나, 몇몇 부분에서 불필요한 세부사항이나 설명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상세하여 시청자의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따라서 시간 효율성 점수는 6으로 설정하였다.

Improvement Suggestions

정보 밀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내용과 불필요한 세부사항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각 주제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핵심 정보에 집중하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편집하면 좋겠다. 또한,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시각적 자료나 요약을 추가하여 정보의 전달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Content Level & Clarity

Difficulty Level Advanced (7/10)

이 콘텐츠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인물인 숙종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특히 조선 시대의 정치적 배경과 왕권의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이 콘텐츠는 고급 수준으로 평가되며,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배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Teaching Clarity 6/10

콘텐츠는 전반적으로 명확한 흐름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 부분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설명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여러 인물과 사건이 동시에 언급되면서 청중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Prerequisites

조선 시대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숙종과 관련된 주요 사건 및 인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Suggestions to Improve Clarity

내용의 구조를 더욱 명확히 하여 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설명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예를 들어, 각 섹션의 제목을 추가하고, 주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간단한 배경 설명을 제공하면 청중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복잡한 역사적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표나 그래픽을 추가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Educational Value

8 /10

이 콘텐츠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의 정치적 업적을 다루고 있어 교육적 가치가 높습니다. 숙종의 통치 기간 동안의 사건들을 통해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권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학생들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다양한 시각에서 숙종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과정은 비판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여 학습 효과를 높이며, 지식의 유지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Target Audience

역사학 전공 학생 고등학교 역사 교사 한국사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 역사 드라마 팬 정치학 및 사회학 전공 학생

Content Type Analysis

Content Type

다큐멘터리 분석 토론
Format Effectiveness 9/10

Format Improvement Suggestions

  • 시각 자료 추가
  • 인터뷰 세그먼트 포함
  • 역사적 재현 장면 삽입

Language & Readability

Original Language

한국어
Readability Score 6/10

Moderate readability. May contain some technical terms or complex sentences.

Content Longevity

Evergreen Score 8/10

Timeless Factors

  •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 정치적 권력과 갈등의 보편적인 주제
  • 인간 관계와 감정의 복잡성
  •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
  • 조선 왕조의 역사적 맥락
Update Necessity 4/10

Occasional updates recommended to maintain relevance.

Update Suggestions

  • 최근 연구 결과나 역사적 해석 추가
  •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비교 분석
  • 관련된 현대 문화 콘텐츠와의 연결
  • 시청자 피드백을 반영한 내용 보강
  • 시대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각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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